jeffrey frederick - '77  spiders in the moonlight





빈약한 상상력 속에서
 
 
오규원
 
 
1

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
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
몇 가닥을 뽑았고, 어제
나는 술을 마셨고 그래서
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, 또
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
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.
어제 나는 다른 때와 다름없는 정오에 출근했고
출근하면서 버스를 타고 옆에 앉은
여자의 얼굴을 한 번 훔쳐 보았고,
이 여자 또한 다른 여자와 마찬가지로
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점을
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
이 여자의 눈에도 별이 뜨리라는 점을 확신했다.
나는 어제 버스가 쉽게 달리는 것을 느꼈고
쉽게 달리는 버스 때문에 이 시대의 우리들이
얼마나 무능 한가를 느꼈고,
쉽게 달리는 버스 속에서 보아도
거리에 선 우리들의 상상력은 빈약해 보였고
그 옆에 선 아이들조차
다시 태어나리라는 상상력을 방해했고,
나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
버스가 고장이 나기를 희망했다.
버스가 탈선되기를, 탈선의 장치의
거리가 준비되기를,
허락받은 사람들은
허락받은 냄새와 지랄의 아름다움을 위해
셋방이라도 하나 얻기를 희망했다.
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나는 갈구했고
그리고
사랑의 말에는 모두 구린내가 나기를 희망했다.
냄새가 나지 않는 사랑이란
맹물이라는 점을
우리는 너무 완벽하게 잊어버려서
이제는 떠올리기조차 너무나 먼
이제는 그 사실을 떠올리려면
셋방을 얻어 주는 그 방법밖에 더 있겠느냐고
나에게 질문하며.
 
 
2

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
술과 함께 오기도 좀, 개뿔도 좀, 흰소리도 좀
십원짜리도 좀 마셨고
그러나 오늘 새벽 잠이 깨었을 때는
오기도 개뿔도 다 어디로 가고
후줄근히 젖은 시간이 구겨져 있었다.
구겨진 새벽의 창문과 뜰과
이웃집 지붕 위로
그만그만한 어제의 오늘 하루가 내복바람으로
나를 보았고,
나는 일어나 있었고,
찬물을 한 사발 마신 후
오늘 하루 그것의 사랑에 박힌
티눈의 정체에게 안부를 나는 물었다.
카세트에 녹음된 금강경의 독경을
한 번 듣고, 뒤집어서
반야경을 한 번 듣고.
오늘 나는 오늘의 어제처럼 출근했고
출근 하자마자 커피를 한 잔 마셨고
전화 두 통화 받았고
전화 한 통화를 걸었다.
담배를 피워물고 새삼 어제
집에 무사히 도착한 일을 신기해하며
아직도 서정시가 이 땅에 씌어지는 일을 신기해하며
아직도 사랑의 말에 냄새가 나면
사랑이 아니라고 하는
맹물 사랑의 신도들을 신기해 하며.
 
 
3
 
내일 나는 출근을 할 것이고
살 것이고
사는 일이 사랑하는 일이므로
내일 나는 사랑할 것이고,
친구가 오면 술을 마시고
주소도 알려 주지 않는 우리의 희망에게
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.
손님이 오면 차를 마실 것이고
죄 없는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할 것이고
밥을 먹을 것이고
밥을 먹은 일만큼 배부른 일을
궁리할 것이고
맥주값이 없으면 소주를 마실 것이고
맥주를 먹으면 자주 화장실에 갈 것이고
그리고 이 모든 것을
사랑하며 만질 것이다.
보이지 않는 미래에게 전화도 몇 통 할 것이고,
전화가 불통이면
편지 쓰는 일을 사랑할 것이다


..-------
시간이라는 긴 기다림의 물들이 고이고 흘러서
골이 패이고, 어느덧 깊이 패인 노인의 주름처럼
자연스럽게 구린내 나는 사랑의 답을 알기를 희망하며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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